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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돌아오는 건 응원보다 걱정이었습니다. 그 답답함을 영화관 안에서 다시 마주쳤는데, 그 영화가 바로 2026년 개봉한 〈누룩〉이었습니다. 동네 양조장 딸 다슬이 사라진 신비한 누룩을 찾아 온 마을을 뒤지는 이야기인데, 줄거리보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훨씬 더 오래 남았습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다슬을 보며 다시 떠올렸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 영화가 막걸리와 누룩을 소재로 한 가벼운 판타지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다 보니 핵심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을 걷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그 감정의 온도가 생각보다 훨씬 정확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다슬은 여고생이면서 동네 양조장 일을 병행하고, 늘 막걸리를 품에 안고 다닙니다. 오빠 다연은 그런 다슬이 알코올 의존증, 즉 알코올 사용 장애(Alcohol Use Disorder)로 이어질까 봐 걱정합니다. 여기서 알코올 사용 장애란 음주 행위가 일상생활과 건강을 반복적으로 방해하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다연의 걱정 자체가 틀린 건 아닙니다. 걱정이 틀린 게 아닌데 왜 다슬이 답답한가, 그 지점이 이 영화의 핵심 질문이라고 느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상황은 꽤 익숙합니다. 제가 새로운 방향으로 일을 전환하려 했을 때, 주변에서 돌아오는 말은 "왜 굳이 그걸 해?"였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제 선택이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연이 다슬을 걱정하는 방식도 그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에서 나온 말인데 받는 사람은 부정당하는 기분이 드는 것, 그게 가족 사이에서 가장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이른바 아트하우스 영화라고 불리는 감성적 독립영화 계열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는데, 저는 그보다 훨씬 보편적인 감정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성만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 충돌을 꽤 정직하게 담아낸 작품으로 읽혔습니다.
신비한 누룩이 단순한 소재 이상인 이유
10년 전 아버지가 양조장을 인수하던 날, 어린 다슬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이한 기운을 내뿜는 누룩을 발견합니다. 이 누룩은 막걸리 맛의 비법이자 일종의 발효 촉매제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 발효 촉매제란 미생물이 당분을 분해해 알코올과 유기산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가속하는 물질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누룩 없이는 막걸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누룩이 영화 안에서는 단순한 양조 재료가 아닙니다. 다슬의 어머니가 막걸리를 마시고 기운을 되찾았다는 과거 이야기가 나오고, 마을 잔치마다 다슬네 막걸리가 빠지지 않는 이유도 이 누룩에서 비롯됩니다. 전통 발효주인 막걸리가 단순한 술이 아니라 공동체의 연결 고리로 기능했다는 한국 민속학적 맥락과 맞닿아 있는 설정이라고 느꼈습니다.
누군가가 이 누룩을 바꿔치기하면서 막걸리 맛이 변하고, 다슬은 무단 침입까지 감행하며 누룩을 찾아다닙니다. 솔직히 이 장면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처럼 읽혔기 때문입니다. 누룩이 사라진 것이 곧 다슬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 감각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전통 발효 문화 연구자들은 누룩을 단순한 발효제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생물문화유산(Biocultural Heritage)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생물문화유산이란 생물 다양성과 지역 문화가 결합된 무형의 유산을 뜻하는 개념으로, 이 영화가 그 개념을 스크린 위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꽤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누룩은 막걸리 발효의 핵심 균총(菌叢) 공급원으로, 한국 전통주 제조에서 누룩 없이는 발효 자체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 영화 속 '신비한 누룩'은 다슬만이 감지할 수 있는 기운을 내뿜으며, 단순한 소재를 넘어 주인공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 누룩이 바꿔치기된 이후 막걸리 맛이 변하는 설정은, 발효 과정에서 균주(菌株) 구성이 달라지면 풍미 자체가 달라진다는 실제 양조 원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가족 갈등이 현실적으로 와닿는 이유, 그리고 다연이라는 인물
범인이 오빠 다연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에서, 저는 의외로 다연이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다연의 행동은 분명 잘못되었지만, 그 동기는 꽤 익숙한 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막걸리와 연관 짓고, 그 막걸리에 집착하는 여동생을 보며 같은 비극이 반복될까 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른바 과잉보호(Overprotection) 패턴, 즉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심리 구조가 다연에게서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과잉보호란 단순히 지나치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상대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가족 사이에서 이런 구조는 생각보다 훨씬 자주 일어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것과 비슷했습니다. 제 선택을 반대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사실 저를 가장 걱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된 건 한참 뒤였고, 그전까지는 그냥 답답하고 속상했습니다. 다연이 누룩의 힘을 마침내 의심하기 시작하는 장면, 그리고 기자가 다연에게 "다슬을 한 번 믿어보라"고 말하는 장면이 유독 길게 남은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가족 내 소통 단절을 다룬 연구에 따르면, 갈등의 핵심은 정보 부족이 아니라 상대의 경험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출처: 한국가족상담협회). 다연이 누룩의 냄새를 목욕탕 계란 바구니에서 맡고 흔들리기 시작하는 장면은, 그 신뢰의 균열이 생기는 순간을 꽤 섬세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합니다.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느린 호흡이 오히려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는 데 더 적합하다고 느꼈지만, 긴장감 있는 서사를 기대하고 보면 답답하게 느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누룩〉 감독이 배우 장동윤 맞나요?
A. 맞습니다. 배우로 잘 알려진 장동윤이 메가폰을 잡은 장편 데뷔작입니다. 제29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으로, 연출 스타일이 배우 출신답게 인물의 감정 묘사에 집중되어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저도 그 점이 꽤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Q. 〈누룩〉은 어떤 장르 영화인가요?
A. 한국 전통 발효 문화인 막걸리와 누룩을 소재로 한 판타지 드라마로 분류됩니다. 자극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감정과 가족 관계에 집중하는 편이라, 판타지 액션을 기대하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잔잔하고 감정적인 여운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잘 맞는 영화라고 봅니다.
Q. 누룩을 바꿔치기한 범인이 누구인가요?
A. 오빠 다연입니다. 다연은 다슬이 막걸리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생각해 누룩을 없애려 했고, 이 과정에서 기자의 추적과 가족 간 갈등이 심화됩니다.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더 복잡한 감정이 남는 설정이었습니다.
Q.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A.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는 판타지, 공포, SF 계열 장르 영화에 특화된 국내 대표 영화제입니다. 여기서 상영된다는 것은 장르적 독창성과 완성도를 어느 정도 인정받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상영작이 곧 수상작은 아니므로, 영화제 선정 자체보다 작품 자체로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누룩〉은 화려한 볼거리나 빠른 전개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느낀 이유는, 이해받지 못하는 감정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렇게 조용하고 정직하게 담긴 작품을 오랜만에 봤기 때문입니다.
다슬이 끝내 누룩을 되찾는 장면보다, 다연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 영화였습니다. 자신의 선택을 설명해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면, 혹은 반대로 누군가를 걱정한 나머지 그 사람의 선택을 믿어주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면 한 번쯤 볼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동윤 감독의 다음 작품이 어떤 방향으로 이어질지도 개인적으로 기대가 됩니다.